아르메니아 대학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일련의 집단학살사건을 말합니다. 최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언급하며 국제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이 사건은 주장하는 측마다 다르나 희생자만 대략 100만에서 1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끔찍한 제노사이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에겐 일제강점기를 떠올리게 하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실제적인 내용들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10만 ~ 30만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스탄불 시내에서의 학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아르메니아인들이 더 이상 비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눈에 보이자 무슬림들은 이스탄불 시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러한 학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 10만에서 30만에 가까운 인원이 학살당했습니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학살에 참여했고, 살해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믿었던 서구의 흔한 배신>
당시 유럽 외교관들이 목격한 것들 중에는 총상은 나은 수준이었고 가죽을 벗겨 놓은 시신들도 흔했다고 합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서구 국가들이 본인들을 도와줄 것처럼 해놓고는 막상 학살당할 때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의 오스만 은행을 점거하는 무력시위까지 했지만, 서방의 도움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구권에 대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증오>
이러한 사건 때문에 지금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지금도 '오스만도 나빴지만 결국 아르메니아를 돕는 척만한 서구권도 그에 못지않게 나빴다.'는.' 비난이 많았습니다. 사실 강대국들은 어디까지나 아르메니아를 이득에 따라 이용했으며, 온갖 착취를 하고 정치적으로 간섭했으며, 러시아인 주교를 통해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는 등 아르메니아에 상당한 압력을 가했습니다.
<2만 ~ 3만의 희생자가 발생한 아다나 학살>
1909년 4월 오스만 제국 아다나 주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으로, 오스만 측 주장으론 독립을 요구하며 아르메니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오스만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들의 무력 충돌로 782명 무슬림이 죽자 이에 대한 보복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오스만 측 발표로는 5천여명 아르메니아인이 죽었다고 발표하는데 아르메니아 주장으론 2만에서 3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00만의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한 1915년 대학살>
오스만 제국은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1차 대전을 겪으며 나라가 기울어 갑니다. 이러한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 제국의 성전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해서 러시아를 공격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반면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대응하여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이를 오스만 제국은 본인들에 대한 반란 위협으로 판단하여 1915년, 카프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약 300만 정도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당연히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연합진보위원회(CUP, 별칭 청년 튀르크 당>>
2차 아르메니아 학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오스만 제국의'연합진보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복잡한 풀네임보다 당시 서구 언론의 애칭이었던 청년 튀르크당으로 더 잘 알려진 이들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습니다.
CUP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옅어서 초기까지만 해도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튀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오스만을 주도한 CUP의 특징>
시대가 변화하여 오스만을 CUP가 주도하게 되었고, 이들이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피지배 민족의 권리나 인도주의 같은 것에 대한 추구보다는 서구 열강의 오스만 침탈을 겪으며 이런 관념들에 더욱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된 집단이었다고 합니다.
추후 학살을 주도할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이었던 탈라트 파샤를 비롯한 CUP 지도부는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로 민족적인 문제로 보았고, 튀르크 인들이 지배하고 영유해야 할 땅인 아나톨리아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박멸의 대상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렇게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시선 자체가 단순한 징벌, 차별의 대상에서 근대적 민족주의적 의미에서 절멸해야 할 열등 인종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전과 달리 1915년에 벌어진 대학살에서는 추방과 학살을 피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도 박해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추방하거나 학살했습니다.
최근 국제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과정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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