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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and Domestic Issues/International Issues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배경, 오스만제국과 아르메니아 밀레트

by ruahryu 2021. 4. 29.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언급하며 자주 등장하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관한 글입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일련의 집단학살사건을 말합니다. 근대라고 불리는 시기에 발생한 최초의 '제노사이드'이며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이유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희생자 수의 경우 주장하는 측마다 다르나 대략 100만에서 1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그림

[아르메니아 학살의 배경]

본격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다루기 전에, 우선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통치시스템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지방자치를 강조한 오스만 제국의 통치 체계>

오스만 제국의 통치체계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아닌 지방자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인구의 통제가 용이한 도시는 오스만 제국이 직접 파견하는 인력들이 통치하고, 향촌은 현지의 유력 인사들이나 군벌, 부족들에 의한 자치를 허락받았습니다. 속국 또한 현지의 왕이나 총독이 자치하고 단지 세금이나 조공을 제때 상납하고 술탄에게 반기를 들지 않는다면 중앙 정부에서는 현지 군벌, 자치 세력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이 지방자치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워낙 넓었고, 그 안에 다양한 민족, 문화, 언어가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통치에는 효과적, 반란에는 치명적>

다만 이러한 지방자치제는 광활한 지방을 통치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일단 지방의 반란이 시작되면 통제력을 삽시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반란이 일어나면, 오스만 제국은 지방의 독립을 막으려고 상당히 가혹하게 진압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사용한 방법이 학살과 강제이주 등이었습니다.

 

<종교에 따라 인정받은 조직, 밀레트>

오스만 제국은 신민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각각의 밀레트(Millet)라는 조직을 인정하여 각자의 종교법과 관습대로 사법을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이를테면 발칸지역의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등은 모두 '그리스 정교회 밀레트'로 묶어 정교회 교구제에 따라 판관을 배정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내정했으며, 튀르크인, 아랍인, 쿠르드족 가운데 수니파를 믿는 사람들은 각 지역의 이슬람 판관과 율법학자들이 책임지도록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들 또한 자체의 밀레트를 갖고 있었는데, 초기에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무슬림이냐, 그리스도인이냐, 유대인이냐가 중요했지 그가 사용하는 언어나 민족은 하등 중요하지 않고 어느 밀레트에 소속되어 있는가가 중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 밀레트로 자치권을 가졌던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정치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에게 종속되어 있었지만 동부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자리 잡은 그 오랜 역사와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받아 정교회권과 다른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밀레트로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오스만과 돈독했던 아르메니아>

19세기 들어서도 적어도 초중반에는 발칸 반도의 정교회권 민족주의 열풍이 불 때도 아르메니아 쪽은 조용히 당국에 적극 협조했던 편이라 '충성스러운 밀레트(millet-i sadıka)'라는 별명까지 있었을 만큼 돈독했었기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계 유럽 열강들과 한통속으로 묶인 아르메니아>

그러나 민족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이는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리스의 독립 이후 오스만 제국 내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인데, 18세기 기독교인들은 해외무역과 권력층을 통해 부와 권력을 축적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에는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이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들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나도 안가, 너도 안가, 오스만 제국의 군대>

그리고 군대 징집 문제가 있었는데, 무슬림은 인두세를 면하는 대신에 군대를 가고 기독교인은 징집을 면하는 대신 세금을 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차이를 없애기 시작하면서 무슬림들은 "우리도 맨날 지는 군대에 가지 않겠다"라고 반발하고, 기독교인들도 "군대를 가느니 차라리 내던 세금을 계속 내겠다" 면서 반발하는 총체적 난국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면서 다시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차이를 규정한 옛 법률의 강화하게 됩니다.

 

<러시아 반란 선동, 민족주의 충돌, 오스만의 상황 악화 등 복잡한 상황 발생>

연장선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의 원인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자치제의 단점에 기반을 두어, 중앙정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러시아의 반란 선동, 청년 튀르크당과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 운동의 충돌, 발칸 반도와 카프카스에서 영토를 상실하여 대규모 오스 만계 난민들이 발생하는 등 오스만 제국이 악화되는 상황이 매우 복합적으로 발생하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불안한 체제와 상황 하에서 제국 내 소수파들은 조용히 참고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유럽에 확산된 민족주의가 드디어 오스만 제국에도 들이닥치며 이들 차별받는 소수민족들이 민족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시작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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