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한국 개발협력의 지난 30년 동안 공여국으로서 수행한 국제개발협력의 역사
본문 바로가기
International and Domestic Issues/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한국 개발협력의 지난 30년 동안 공여국으로서 수행한 국제개발협력의 역사

by ruahryu 2021. 4. 5.

 

 

저번 글에서는 한국의 수원 경험이 다른 개발도상국에 제공하는 시사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https://lifeofjoy88.tistory.com/242

 

이번 글에서는 한국이 개발협력의 성공담을 가지고 지난 30년 동안 공여국으로서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국제개발협력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ODA 공여국으로서의 한국의 개발협력 역사 요약

 

<1960년대 개발도상국 훈련생 연수를 필두로한 개발협력 사업 초기>

한국이 공여국으로서 가장 먼저 시행한 사업은 1963년도에 실시된 개도국의 연수생을 받아서 훈련을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미국의 국제개발청(USAID: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의 자금으로 원조를 실시했던 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원조를 실시한 사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965년도에는 한국 정부의 자체 자금으로 개발도상국의 훈련생 초청사업을 시작했고, 1967년도에는 전문가를 개도국에 파견하는 사업을 시작하는 등 프로그램도 다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도에는 우리나라 의료단 파견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1969년도에는 프로젝트형 기술협력사업을 시작을 하였습니다.

 

<1970년대, 북한과의 원조 경쟁 그리고 국제상황 변화에 따른 원조의 방향성 변화>

1970년도 중반까지는 주로 UN 기구 등의 자금을 받아서 개발원조를 실시하였으나, 한국의 경제성장이 뒷받침되면서 개발도상국으로부터의 수요가 매년 증가하였고, 점차 한국 정부의 자금에 의한 원조 규모를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해외원조를 실시한 배경에는 북한과의 외교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로 한국의 ODA는 아프리카 지역에 많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의 아프리카 지역은 신생 독립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이 지역에서는 소련식 발전모델을 채택한 관계로 북한이 아프리카 지역에서 한국과의 외교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외교적인 측면에서 북한을 이기기 위해서 한국 정부는 아프리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오자 한국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시작을 했는데요. 1972년도에 태권도 사범을 파견하였습니다. 1977년부터는 무상개발협력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는데 이것도 바로 남북 간의 외교 경쟁의 결과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은 1970년대에 들어오자마자 여러 가지 국제적인 상황의 변화가 있었는데, 미국과 중국이 화해를 하게 되고 베트남이 통일 되었으며, 여러 가지 주변적인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한국도 안보 외교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비동맹국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1973년도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6.23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그동안의 지속적인 모든 외교정책의 발판이었던 서독의 '할슈타인 독트린 (Hallstein Doctrine)'을 공식적으로 폐기를 하게 되었습니다이러한 여건 하에서 양자 간 무상원조의 프로그램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고, 이와 같은 원조대상국과 관련하여 북한의 영향력에 대응할 필요성에서 시작된 것이 사실입니다.

할슈타인 독트린의 할슈타인

*할슈타인 독트린 - 서독의 발터 할슈타인이 1955 9 22일에 내세운 외교 원칙으로,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독일 민주 공화국을 승인하거나 동독과 수교하는 국가와는 관계를 설정하지 않겠다는 정책

 

 

 

<1980년대, 아시안게임 및 올림픽 개최 더불어 개발협력의 증대 시기>

1980년도에 들어와서는 한국의 프로그램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1982년도에 한국개발연구원(KDI: Korea Development Institute)에서 개발도상국의 인사를 초청해서 우리의 개발 경험을 준수했던 국제개발연찬사업(IDEP: International Development Exchange Program), IDEP 프로그램이 시작이 되었고요. 1984년도에는 건설부에서 무상건설기술 용역사업을 실시하였고, 노동부에서는 직업훈련원 건립, 1989년도에는 해외청년봉사단 프로그램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1986년도의 아시안게임, 1988년도의 서울올림픽에 즈음해서 외채의 감축, 국제수지 흑자의 실현으로 우리나라의 ODA 사업이 본격화되었는데 우리의 경제 규모 증가와 국제무대의 위상 제고로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 수행의 필요성이 제고되었습니다. 특히 대외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개도국에 대한 수출 증진,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 기반 마련을 위해서 공적개발원조(ODA) 증대가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987년도에는 한국은 정부는 수출입은행을 통해서 300억 원을 출연해서 양허성 차관(concessional loan) 유상협력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한국이 올림픽을? 1988 올림픽 개최

 

<1990년대 OECD 가입 본격적인 개발협력의 시작>

1991년도에는 우리 정부는 그동안 건설부, 과학기술부 등 각 부처에서 산발적으로 실시해 오는 기술협력, 인적 교류 사업을 통합 관리할 필요성을 느껴서 외교부 산하로 KOICA, 한국국제협력단을 설립을 하였습니다. 또한 1990년도에 들어와서 우리 ODA는 본격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91년도부터 2000년대까지 우리 ODA 규모는 연평균 17.7% 22.6% 빠른 성장을 보였고요. 1996년도에 OECD 가입으로 본격적으로 원조 지원 필요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1996년도 OECD 가입 그리고 2009년도에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에 정식으로 가입을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원조 공여국이 되었습니다.

 

<2000년대 국제사회에 발맞춘 한국의 국제개발협력>

2000년도에 들어와서 한국의 ODAUN이 선언한 MDGs를 달성하기 위해서 국무총리실에서 '한국의 중장기 ODA 로드맵'을 만들었고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ODA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시작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제도적인 면에서는 2006년도에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출범하여서 우리 정부 차원의 ODA 정책 및 집행의 일관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2007년도에는 해외긴급구호에 대한 법률을 제정했고요. 2007년도 9월에는 한국국제협력단의 개정을 통해서 국제빈곤퇴치기여금제도를 도입했고 2010년도에 국제개발협력기본법을 제정하여 한국의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습니다.

한국은 OECD/DAC(개발원조위원회)20091125일에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하였기 때문에 우리 정부에서는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원조 공여국으로 인정받은 날인 1125일을 국제개발협력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 정부는 2010년 이후에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개도국의 빈곤 해소, 개발 격차의 해소를 위한 '서울 개발 컨센서스'를 도출하였고, 2011년도에는 '부산세계원조총회'를 개최하여 국제사회의 원조 패러다임(paradigm)'원조효과성'에서 '개발효과성'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위급회담까지? 부산세계개발원조총회

 

 

이번 글에서는 한국이 개발원조의 성공담을 가지고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국제개발협력 활동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역사 속에서 우리의 개발협력 원조 규모가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