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효율적인 중국의 사회제도
1.1 산업혁명의 기초 배경인 민법의 미발달
동아시아의 중국 관료제와 비교하면, 동아시아는 개인과 개인 간의 충돌을 다루는 사법의 발전 자체가 매우 미약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형법만 극히 발전해있고, 관료들이 주된 관심을 가지는 재판도 거의 형사 재판이었다. 결국 정의는 수평적인 개인 간 갈등 해결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국가가 개인에게 부여하였다.
민법이 발달하지 못해 민간 사이의 갈등은 관습적, 비공식적으로 해결했고, 상거래에서의 갈등은 행회에서 해결했으며, 이웃 사이 갈등은 촌장이나 원로가 해결했다. 유럽에서는 10세기부터 발달한 공증제도조차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중국에서는 상업거래에 있어 기본적인 신용 자체가 공적으로 보증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일찍이 길드, 회사를 중심으로 상업과 민법에 대한 제도가 발달한 유럽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1.2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국가 운영 체계
청나라에서 상업거래는 태조 홍무제가 농업을 국부의 원천으로 삼고 상업을 멸시했기 때문에, 제도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관부의 감독과 과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아무리 큰 상업회사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관료의 후원이 필수였다. 근대적인 정신을 지닌 기업가는 정부 관료들의 관료주의와 경쟁해야 했으며, 친척 편중 주의로 개인적인 이익을 배려해주며 수탈 내지 횡령 지원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국가 관리 자체가 굉장히 비효율적이었는데, 지방 행정에 하위 관료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가 혼자서 사법, 행정, 군사를 전부 도맡아 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인구로 인해 업무량도 증가해 청나라 때는 만성적으로 업무가 지체되었다. 도시들이 자체적으로 발전하여 중소도시를 이룩한 곳들이 무수히 들어섰으나, 행정구역으로 새로 개편하지 않아 관료 파견조차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1.3 축적된 자본의 잘못된 사용
명과 청시기에 퍼져 음식뿐만 아니라 복식, 가구, 여행문화에서도 드러나는 사치 풍조는 축적된 자본을 산업혁명에 쓰지 못한 이유가 된다. 차, 술, 기름, 창자, 육포를 파는 상점도 증가하고, 사치스러운 의류와 장신구가 일상품이 되었다. 또한 사치품으로 인식된 물품이 서민에게도 퍼지게 되는데, 목재로 만든 가구도 서민 집에 들어갔고 일부 사대부가 높은 신분의 상징인 가마를 누구나 탄다고 한탄할 정도로 사치품들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상업의 잉여를 상공업이 아닌 농민에게 단기대출을 해주는 고리대금업에 출자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성장한 상인계층은 토지에 투자하였고 이러한 토지는 관료에 예속화되면서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2. 청나라의 고도 발전의 함정
2.1 청나라의 강력한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
중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하나의 단일 제국이 너무나 강력한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했다는 데 있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와 관료들의 지배력 하에서 이단적 사상가들은 나오기 힘들었다. 설령 이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인물이 나오더라도 그들의 사상이 전통의 권위를 전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떠한 경쟁 세력도 중국 내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으며, 지식인에 대한 후원은 황제가 어떤 정책을 펼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중국은 많은 책을 생산하고 소비했으나 지식이 체계적으로 확산되어 보존되는 일은 드물었다.
이러한 중국에서의 정치적, 지적 환경에서는 산업 계몽주의가 출현할 수 없었고, 기존 체제를 뒤엎을 혁신 인재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과거제는 점차 안정 지향적이고 기득권의 지대를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형성하는 쪽으로 변질되어 갔고, 중국의 높은 교육투자와 인적자본 축적은 생산적인 영역으로는 향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유럽의 높은 교육을 받은 이들은 금융이나 상업,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본인의 재능을 살려 부를 축적해 갔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중국에서는 모두가 과거시험에 매달렸고, 실무와 별 상관없는 경전을 암기해야 했다.
2.2 지나치게 풍부한 노동력
앞서 살펴보았듯 약 1600년부터 1911년 중국의 인구는 약 1억 5천만에서 약 4억까지 적어도 두 배 이상의 인구가 증가했다. 당시 청나라 시대 농촌은 과잉인구 때문에 농업뿐 아니라 가내수공업도 겸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면직물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영국산 기계제 면포를 압도하는 물량을 생산해낸다.
실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에 많은 영국산 기계제 면포가 들어왔으나 중국에서 수공업으로 생산된 면포에 밀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청나라의 연간 면포 생산량이 6억 필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생산량을 영국이 따라잡는 데 약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렇듯 중국은 인력 공급이 너무 많아서 기술적 혁신이 일어날 동인이 없었다고 설명이 된다. 기계를 개발하는데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을 이용하는 비용이 훨씬 싸서 기계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다르게 산업혁명이 일어난 유럽 지역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에 비해서 임금이 높았다. 특히 영국은 유럽에서 두 번째로 노동자 임금이 비쌌던 프랑스에 비해서도 2배 가까이나 임금이 높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비교하면 런던의 노동자 임금은 4배에 달했다.
영국의 노동자 임금이 높았던 이유는 전 세계의 식민지 유지를 위해 군인으로 수많은 인구를 징집하여 인구 유출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위에 서술했듯 광산의 물을 퍼내는 펌프가 아주 비싼 가격이어도 노동 비보다 싸다는 이유로 증기기관을 사용했고, 그것은 우연히도 제임스 와트에 의해 개량되며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린다.
3. 자급자족의 성향과 경제 순환의 함정
중국은 지독히도 항해와 새로운 시장개척에 관심이 없었다. 명나라 초반 때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앞선 항해술을 보유한 나라였다. 명나라는 마 씨 성의 이슬람교도 정화를 통해 1405~1433까지 7차에 걸쳐 중국 남부의 교역로를 따라 해양 원정을 실행했다.
정화의 원정의 특징은 개척이 아닌 기존의 교역로를 따라 간 원정이라는 점, 상업이 아닌 외교적 목적을 지닌 원정이라는 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처음이자 마지막 원정이라는 점이다. 정화의 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무려 반세기인 50년이 빨랐으나, 이후의 후속 원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중국의 해외 개척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결국 이러한 해외 개척의 실패는 고스란히 경제순환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영국은 천연자원 및 식량 자원을 가지고 올 수 있는 막대한 해외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 순환의 함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영국은 당시 아메리카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막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업 생산물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과정이나, 식량가가 상대적으로 폭등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중국과 달리 영국은 면포를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가 있었지만, 중국은 자국 내에서만 유통되다 보니 경제 순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1600-1911년 중국의 인구는 적어도 두 배 이상의 인구가 증가했다. 약 1억 5천만에서 약 4억까지 증가했고, 이모작 실시, 감자, 옥수수 등 새로운 작물 도입, 관개사업으로 토지면적 증가, 농기구, 가축, 퇴비 개선 등 곡물 공급의 꾸준한 증가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농업노동의 생산은 한계가 있었고, 벼의 재배에서 투입되는 노동력에 비해 산출되는 양의 감소되는 질적 발전이 없는 경제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 영국과 중국은 상업 발달 제도, 권력층 견제 제도, 기술 발전 배경, 원료 조달 및 판매시장 확보, 산업 혁명의 기초 자본 확보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먼저 상업 발달 제도 측면에서 유럽이 지방 자치 일찍이 발달되고, 상업 발달로 인한 경제적 권익 보호 제도 및 조직 발달한데 반해 중국은 민법 발달하지 못해 관습적, 비공식적으로 문제 해결이 대부분이었고, 공증제도 조차 없어 신용 자체가 공적으로 보증되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다.
권력층 견제 제도 측면에서 영국은 의회제도의 발달로 왕이 징세권 남발 불가하고 명예혁명 이후 사법체계 확립을 통한 특허권 보장이 되는 등 산업 기술 발달에 긍정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반면 중국은 근대적 정신을 지닌 기업가들도 관료주의와 경쟁해야 했으며, 관부의 지나친 감독과 과세를 피할 수 없었다. 중국 특유의 막강한 권력 앞에서 다른 사상이 나오기 어려워 새로운 혁명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기술 발전 배경으로 유럽에서는 17세기 갈릴레오, 뉴턴 등의 과학자를 통한 과학혁명 선행되며 산업혁명의 가능성을 열었고, 풍부한 석탄 매장량을 가진 자연환경을 보유하여 투자 여력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 수공업으로 생산된 면포가 영국에서 생산되는 면포의 양보다 많을 정도로 지나치게 풍부한 노동력으로 인한 기술 개발 동인을 상실한 당시 상황이었다.
원료 조달 및 판매 시장 확보 측면에서는 영국은 증기선과 항해술의 발달로 식민국가에서 값싼 원료 수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데 반해 중국은 서구보다 먼저 더 나은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해외 원정 기피하였고, 이로 인해 내수시장에서의 자급자족으로 인한 경제 순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산업 혁명 기초 자본 확보 측면에서 영국은 식민지에서 수탈한 값싼 원료를 상품으로 가공하여 막대한 판매 수익 축적하게 된다. 이렇게 산업기지 구축 및 노동자 기술 교육을 위한 자본 확보한 영국은 잉여 재정을 해군력 증가와 산업발전에 투자하여 빠른 산업화 진행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중국은 남는 자본이 서민층까지도 유행한 사치품을 구입하는데 쓰이고, 고리대금업에 축적된 자본을 사용하며 자본주의 발전에 심각한 저해가 일어난다.
누군가는 영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산업혁명은 지금까지 설명했던 모든 우연한 현상들이 합쳐지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적절한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석탄이 매장된 자연환경,, 탐욕스러운 사업가들, 대서양과 아프리카에서 수탈한 자원들, 협조적인 사회 시스템과 정부제도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한 기회가 중국처럼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을 하는데 만족하며 더 높은 곳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거대 권력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연으로만 치부하기엔 산업 발달을 장려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서구의 완비된 시스템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 흐름에 현재의 우리가 있다. 많은 국가들이 빠르게 새로운 시대의 기술을 적용하며 발전해 나가고 있는데, 지금 우리의 현주소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 새로운 사상가들이 나올 수 있는 교육 환경인지, 그들의 권리는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는지 앞으로의 시대에 한국이 뒤처지지 않는 중심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초의 산업혁명 시기를 준비했던 영국처럼 발돋움을 위한 온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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